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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현악에 맞춘 노래

  1.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2.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3.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4.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
  5.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6.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7.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8.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9. 그들의 입에 신실함이 없고 그들의 심중이 심히 악하며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그들의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10. 하나님이여 그들을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말미암아 그들을 쫓아내소서 그들이 주를 배역함이니이다
  11.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12.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

[ 묵상도움글 ] 

오늘 시편 5편에 보면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1절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 2절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 3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병을 고쳐주세요. 성공하게 해 주세요.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원수를 갚아주세요”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시편 기자는 의로운 삶을 살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8절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의롭게 살고자 하는 소원’ 정말 놀라운 소원입니다. 이런 소원을 가진 사람이 진정 복있는 사람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정해준 잘 되는 길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의롭게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면서까지 우리에게 이루시려는 것은 우리가 죄의 종노릇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4-6절에서 시편 기자는 “오만한 자, 행악자, 거짓말하는 자,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에 대하여 탄식합니다. 그리고 9절에서 그들의 입에 신실함이 없고 그들의 심중이 심히 악하며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그들의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이런 사람들에 의하여 둘러싸여 있으면 사람이 당연히 같이 악해지게 됩니다. 사람들이 다 법을 안 지키는데, 나만 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손해 보는 일이고, 억울한 일이며, 바보 취급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결국 주위 사람들을 따라 적당히 죄짓고 살아갑니다.

7절 그런데 이 시편 기자는 주위 사람들이 다 악하게 사는 데도 자기만이라도 의롭게 살고자 열망한다는 것입니다. “나 한 사람이라도”입니다. 십자가 복음으로 사는 우리는 세상 사람과 소원이 다릅니다. 우리는 악한 세상 탓하지 말아야 합니다. 악한 자의 형통을 부러워 말아야 합니다.

잠 24:19 너는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 세상은 우리의 선생이 아닙니다. 세상이 우리의 미래를 책임져주지 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십니다. 우리의 미래는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의롭게 살면서 조급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너무 힘들어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요?”  갈 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세상이 다 악한대도 의로운 길, 선한 길, 경건한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야 말로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예수님을 믿지만 마음에 의롭게 살고자 하는 열망 보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대한 욕망이 더 클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 생각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문제는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오셨지만, 세상이 주는 생각으로 우리 마음이 꽉 차있다면 성령님은 우리 마음을 주관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님을 따라 살려면 먼저 주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하였습니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러므로 24 시간 예수님을 생각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우리 안에 계신데, 우리 마음이 세상 것으로 꽉 차있다면 이것이야말로 두려운 일입니다.  시편 기자는 아침 첫 시간에 하나님께 의로운 자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했습니다.3절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 복음 메세지 ]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겸손입니다.  유기성 

 

우리를 진정 겸손하게 만드는 것은 첫째 자신이 말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고 둘째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사랑과 지혜, 권능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겸손의 첫번째 측면만 지나치게 생각하여 왔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성과 부족함을 자책하는 것이 겸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까닭에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허락하신 많은 축복을 잃고 말았습니다. 겸손은 그리스도인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충만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겸손의 두 번째 측면 때문입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완전하시고 사랑과 지혜, 권능으로 충만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곧 겸손입니다.

한번은 후배 신학생들이 인터뷰를 하러 왔었는데, ‘왜 나를 인터뷰하려느냐?’ 고 물었더니 “겸손해 보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무척 당황했습니다. 그것은 제가 교만함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음을 늘 부끄러워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말할 수 없이 교만한데, 저들은 왜 나를 겸손하다고 보았을까?’ 사람들은 저를 착하고 성실하고 온유하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제가 착하게 생겼기 때문이지 실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고 하신 모양입니다. 그러나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주님만 바라보려고 애를 쓰는 것이 후배 신학생들의 눈에는 겸손하게 보였을 수 있겠다는 것입니다. 겸손은 ‘교만하지 않으려고, 겸손해지려고’ 애를 써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도를 닦아서 이루어지는 경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자신의 실상을 보는 눈이 뜨이고, 주님을 바라보게 되면, 누구나 겸손해집니다. 

 

겸손은 자신의 죄성만 깨달아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왕이신 주 예수님과 연합하는 자가 되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때 겸손은 기쁨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종의 형체를 취하셔서 그분의 영광을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마 20: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려는 것은 모든 이들의 종이자 조력자가 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거룩하고 기쁨이 가득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겸손이 회개보다 더 높은 차원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삶에 우리가 동참하는 것이 곧 겸손입니다. 이것을 믿으면 우리는 겸손히 모든 이들의 종이 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뜻을 가장 완벽하게 성취해내는 것이며,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축복임을 알게 됩니다. 

제 경험을 돌이켜보면 겸손이 예수님의 제자된 이들의 구별된 특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열심히 겸손하기를 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겸손하려는 갈망이 미미합니다. 예수님과의 진정한 교제를 나누려면 겸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가장 기본 덕목임을 알지 못하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며, 통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 주님과 친밀히 동행하기 원한다면 올바른 신앙 고백과 더불어 겸손의 태도를 점점 키워가야 합니다. 그리고 겸손은 24 시간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의 부인할 수 없는 특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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