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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 구약/시편

시편 17편 - 다윗의 기도

리틀 헤밍웨이 2020. 5. 26. 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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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기도

  1. 여호와여 의의 호소를 들으소서 나의 울부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 되지 아니한 입술에서 나오는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2. 주께서 나를 판단하시며 주의 눈으로 공평함을 살피소서
  3.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내게 오시어서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사오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리이다
  4. 사람의 행사로 논하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따라 스스로 삼가서 포악한 자의 길을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5.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하지 아니하였나이다
  6.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으므로 내가 불렀사오니 내게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7. 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
  8.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
  9. 내 앞에서 나를 압제하는 악인들과 나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10. 그들의 마음은 기름에 잠겼으며 그들의 입은 교만하게 말하나이다
  11. 이제 우리가 걸어가는 것을 그들이 에워싸서 노려보고 땅에 넘어뜨리려 하나이다
  12. 그는 그 움킨 것을 찢으려 하는 사자 같으며 은밀한 곳에 엎드린 젊은 사자 같으니이다
  13. 여호와여 일어나 그를 대항하여 넘어뜨리시고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
  14. 여호와여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주의 손으로 나를 구하소서 그들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 주는 자니이다
  15.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 묵상도움글 ]

성도들은 죄에 대하여 단호한 태도를 갖어야 합니다. 그것은 죄의 대가가 너무나 무섭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아무렇지도 않게 죄 짓는 사람들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들의 마음은 기름에 잠겼으며 그들의 입은 교만하게 말하나이다(10)” “여호와여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주의 손으로 나를 구하소서 그들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 주는 자니이다(14)” 돈이면 제일이고 마음에는 욕심이 가득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교만하고 자녀들에게 재산 물려주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 세상에서만 잘 살면 된다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이 끝나는 순간, 하나님 앞에 설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죄의 대가가 어떤 것인지 알고 나면 죄가 더 이상 유혹이 되지 않습니다. 다윗이 죄를 짓지 않은 것은 죄가 더 이상 유혹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한 비참한 결과를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결심하고 죄와 싸우는 것입니다.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리이다”그러나 죄의 대가가 꼭 죽고 난 다음에 지옥에 가는 것만은 아닙니다. 성도가 죄를 짓지 않은 이유는 죄를 지으면 나중에 지옥의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지옥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시편 17편을 보면 다윗은 엄청난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입니다. “여호와여 의의 호소를 들으소서 ...(1)” “주께서 ... 밤에 내게 오시어서 나를 감찰하셨으나(3)”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으므로 내가 불렀사오니 내게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6)”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8)”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15)” 다윗은 하나님과 너무나 친밀히 동행하며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직 하나 다윗의 기쁨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누리는 가장 큰 복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복은 예수 믿는 모든 이들이 누리는 복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마 28:20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제자들만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여기에 성도가 무슨 일이 있어도 죄 짓지 않으려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이런 친밀함을 깨뜨리기 때문입니다.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고 우리야를 죽게 한 후, 그가 하나님께 구한 것은 성령을 거두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11)" 죄를 지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변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하나님이 갑자기 두려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지옥의 고통인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손해보고 고생을 하고 죽을지언정 죄는 짓지 않으리라! 결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자처럼 ‘죄짓지 말아야지.’ ‘죄 짓지 말아야지.’ 하면 안됩니다. ‘완벽해야지.’ 하는 것은 병적인 증상이기도 합니다. 잘못하면 겉으로만 죄 짓지 않았지 무서운 율법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죄짓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것은 너무나 귀하지만, 죄 지은 자를 벌레 보듯 하면 안됩니다. 이것이 더 큰 죄입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 7:3)" 간음한 여인이 끌려왔을 때, 모세의 율법대로 하면 돌에 쳐 죽여야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면서 살려 주셨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내가 받은 용서는 당연하고 남이 받은 용서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죄냐 아니냐?’를 물을 때, 이것이 사랑인가?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실까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분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는다고 우리 자신이 완전한 사람이 된 것은 아닙니다. 절대 착각하면 안됩니다. 결코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죄 짓지 않는 이유는 늘 함께 하시는 예수님 때문입니다. 다윗은 15절에서 고백했습니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다윗은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의 삶을 산 사람입니다. 이것이 모든 성도들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 5:18)" 주님과 친밀히 교제하면 죄짓는 것이 지옥의 고통입니다. 그래서 죄를 떠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경건입니다.  

 
[ 복음 메세지 ]

예수님과 친밀히 동행하는 삶을 살고 싶어도 잘 안된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과 친밀하게 되는 것이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과의 친밀함 없이 오랫동안 살았었기 때문에 막연하고 익숙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달라지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시작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아버지와 자녀 관계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게 됩니다. 이 관계와 교제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분명히 구별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변화는 ‘하나님과의 관계’ 보다 ‘하나님과의 교제’에 더 큰 영향을 받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분명하지만 하나님과 교제는 애매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입니다. 그것은 불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교제는 다릅니다.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리고 계속 변합니다. 
주님과 친밀해지는 것을 가로막는 큰 장애물은 조급함입니다.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복음을 듣는 순간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도 순간에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친밀함은 다릅니다. 꾸준히 주님을 바라보며 순종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도전을 받으면서도 실제로 경험하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서도 주님과의 친밀함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끔찍한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려서 해외에 입양되었다가 성인이 되어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만나보고 싶어 한국을 찾아오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렵게 수소문하여 친부모를 만났을 때, 심정은 너무나 복잡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만나고 싶었는데 막상 만나보니 너무나 낯선 사람인 것입니다. 이처럼 고아 아닌 고아처럼 신앙생활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과 친밀히 동행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갈망을 가져야 합니다. “고아로 버려 두지 않고 너희에게 오리라”는 주님의 약속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놀라운 은혜요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갈망은 우리를 주님과의 친밀함으로 이끌어 줍니다. 조급해 하지 말고, 항상 주님을 생각하려고 하며, 주님께서 말씀하실 것을 기대하며 귀기울이고, 깨닫게 하시면 순종하기를 꾸준히 해야 합니다. 그러면 얼마 안가서 주님과의 친밀함이 놀랍게 깊어졌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과의 친밀함에 대한 갈망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예수님을 오래 믿었어도, 주님과의 친밀함을 누릴 수 없습니다. 관계가 교제로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영성일기, 어떤 사람에게는 큰 도움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무거운 짐이 됩니다. 주님과 친밀하고자 하는 갈망의 차이 때문입니다. 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자 하는 갈망이 있는 자, 그런데 잘 안되어 괴로와하는 자에게는 너무나 유익하고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주 예수님과의 인격적이고 친밀한 교제의 갈망이 없는 자, (맛있는 음식을 먹고자 하는 갈망, 돈벌고자 하는 갈망, 성공하고자 하는 갈망, 교회 부흥을 이루고자 하는 갈망, 보고 싶은 운동경기 중계를 보고자 하는 갈망 보다 못한 자) 에게는 짐스럽기만 하고 따분하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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